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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 Study/Philosophy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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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포스트는 제가 2018년 무렵까지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의 포스트들을 아카이빙 하기 위해 옮겨온 글입니다.

당시 네이버 블로그에서 사용하던 문체는 티스토리와는 달리 존대 없는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카이빙 과정에서 별도의 수정 과정은 거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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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블로그는 더 이상 운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카이빙 된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차례로 삭제할 예정입니다.)

 

BLACKEST BLACKIST : VI VERI VENIVERSUM VIVUS VICI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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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신선설의 등장과 발전

신선설의 발상지는 중국의 산동성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신선설이 생겨났다. 이 신선설은 중국 고대에 있었던 산악신앙(山嶽信仰)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중국 종교의 원초적 형태인 무술(巫術)·자연숭배 등이 혼합되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술(方術)이 생겨났다. 이 방술은 전국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술을 행사하는 사람을 방사(方士)라고 하는데, 방사가 제왕과 밀접하게 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였고, 한무제(漢武渧) 때에는 제왕 측근에서 거의 떠나지 않을 정도였으므로 방술은 상층사회에 굳게 뿌리 내리게 되었다.

 

초기 방술과 신선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갑골문 (사진 제공: 한국경제신문)

한편 신선설이나 방술은 호소할 곳 없는 일반 백성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변천하였다. 전한 말부터 전설의 임금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초인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신선으로 꼽혀 황로신앙(黃老信仰)이 대두하였다. 방사들의 조작적인 선전과 참위설(讖緯說)의 유행이 황로신앙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황로신앙을 가미시킨 신선방술의 내용이 조정, 확대되고 신흥종교였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로 개괄되는 한 종교로 형태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2. 도가사상과 도교의 구분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열자(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노장으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과 구복적 성격의 도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어 도교와 도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3. 종교로서 갖는 도교의 특징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도교라는 종교는 결국 도가와 신선설, 태극도설 등의 다양한 학풍에 온갖 구복적 요소들이 뭉탱이로있다가유링게슝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道家)·역리(易理)·음양(陰陽)·오행(五行)·참위(讖緯)·의술(醫術)·점성(占星) 등의 법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어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이다. 도교는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없이 받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도교라는 명목으로 포괄되는 신앙이나 행사의 내용이 매우 복잡해졌다. 도교는 신선설과 연결되어 불로장생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됨에 따라 건강관리를 중시하여 심리적으로는 사과신적신앙(司過神的信仰)과 주술적인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조식(調息), 벽곡(辟穀), 도인(導引), 방중(房中) 등의 방법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까지 연결되는 도교의학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그 극치가 금단(金丹)이다. 그러나 금단은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잃게 하는 독극물일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금단의 연조(煉造)를 연금술 같은 물리화학적인 방술에서 끌어 내면서 수련적인 단학(丹學)으로 전개하여, 도법을 닦는 의의와 결합시키는 데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도교의 금단도(金丹道)는 연금술적인 외단(外丹)과 수련적인 내단(內丹)으로 크게 나누어졌고, 결국은 내·외단의 통섭(統攝)이라는 방향으로 이론체계를 정립시켰다.

4. 도교의 세계관

도교는 신선설을 기조로 하고 있으므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선단(仙丹), 불로초, 영약(靈藥), 각 계층의 신선, 초능력이 따르는 각종 도술, 천상과 지상의 다양한 선계 등 환상적인 경지를 크게 개척해 놓았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구이므로 도교에서 개척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허황되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위안과 희열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도교에서는 천계가 욕계육천(欲界六天),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 상사천(上四天 또는 사범천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 도합 36천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하위의 욕계육천에 사는 사람도 수명이 1만 년이고, 그 위의 색계 십팔천의 사람은 수명이 1억만 년이며, 무색계 사천에 사는 사람은 수명이 억겁 년이다. 상사천부터는 사람을 죽게 하는 삼재(三災)가 없어서 죽음이 취소되고 그야말로 장생불사하여 무량수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득도하여 선인(신선)이 되면 인간의 수명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장수한다고 한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고, 그 아래의 옥청(玉淸;청미천淸微天,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上淸;우여천禹餘天,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청(太淸;대적천大赤天, 도덕천존道德天尊) 세 군데로 이루어진 삼청경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으며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伯)·선대부(仙大夫)가 있어 현세의 궁정조직 같이 되어 있다.
한편 도교에서는 또 십주(十洲), 삼도(三島), 십대동천(十大洞天),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 칠십이복지(七十二福地) 등 지상에도 선진인(仙眞人)이 사는 동천복지로 불리는 각종의 낙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진인이 사는 천지간의 선계와 그 밖에 있는 속계가 있는데, 선계와 속계 사이에는 내왕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도교에서는 성수신앙(星宿信仰)을 받아 들여, 북극성(北極星;현천상제玄天上帝), 북두성(北斗星;북두신군北斗神君), 남두성(南斗星;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帝), 문창성(文昌星;문창제군文昌帝君) 삼태성(三台星) 등을 경배한다. 한편 도교에서 받드는 신은 성황신(城隍神)·토지신·삼관(三官)·사어(四御)·재신(財神)·문신(門神)·조신(竈神)·왕령관(王靈官)·관제(關帝)·낭낭(娘娘)·용왕·팔선(八仙)·여조(呂祖)·마조(媽祖) 등 그 수효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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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국 도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1) 원시 도교 교단

후한(後漢) 말년(2세기에서 3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는 정치의 난맥으로 혼란이 극심해지고 환관(宦官)의 횡포와 부호들의 방종이 심해서 일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종교 집단이 생겨났다.

 

우길의 태평청령도를 이어받은 장각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창천이사 황천당립은 당연히 황사를 예견한 말은 아니다...

후한 순제(順帝) 때 우길(于吉)이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집단을 만들고 그 도서명(道書名)을 따서 태평도를 표방했다. 우길의 뒤를 이어 장각(張角)이 교주가 되어 태평도의 조직을 굳히고 도서(道書)·부적(符籍)·참회(懺悔) 등을 사용하여 시행한 질병치료의 방법이 주효해서 많은 도당을 얻어 왕실을 타도하고 자기가 천하를 잡을 욕심으로 무장 봉기했다.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다. 장각이 전사한 후 태평도는 몰락해 버렸다.

 

태평청령도의 몰락하고, 이후 촉한이 되는 한중 지역에서 장릉의 오두미도가 성행하였다.

태평도보다는 좀 늦게 장릉(張陵)이 후한 영제(靈帝) 때에 오두미도를 시작했다. 장릉은 만년에 유학을 버리고 장생법을 배워 황제(黃帝)의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했고, 또 사천(四川)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道書)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수많은 신이 강림해서 신출정일맹위법(新出正一盟威法)을 그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장릉은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 주어 수많은 신도를 얻어 쌀과 비단을 바치는 법을 정하고,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들어 종교집단을 이루었다.
장릉의 손자 장노(張魯)가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그 교법과 조직을 완성시켜, 한 왕국을 방불케 하는 조직화된 종교집단을 성립시켰다. 장노가 조부 장릉을 천사(天師)라 칭해 오두미도를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렀다. 부(父) 장형(張衡)을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 하여 조부손이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같이 말해 삼장(三張)으로 합칭하기도 한다.
장노가 조조(曹操)에게 굴복해 죽으면서 교세가 약해졌으나 천사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正一敎)의 전신으로 도교 정통의 자리를 차지해 내려왔다. 태평도와 오두미도 내지 천사도는 부적과 도록(道籙)을 존중한다 하여 부록파(符籙派)로 불리기도 한다.   

2) 단정파

단정파에서는 중국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는 '연단술'의 연구가 활발하였다.

복용하면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된다는 선단(仙丹) 또는 금단(金丹)으로 불리는 영약(靈藥)의 연조(煉造)는 선진(先秦)시대부터 전해지지만 후한 말기 오(吳)의 위백양(魏伯陽)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참동계)는 금단도(金丹道:금단을 연조하는 방법)를 천명한 대표적인 도서(道書)로 받들어진다. 위백양은 자기가 저술한 ≪주역참동계≫의 방법에 따라 연조한 금단을 먹고 일단은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약을 먹고 진인(眞人)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단 연조에 주력하는 이 계열의 도인(道人)들을 단정파(丹鼎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晉)의 갈홍(葛洪)이 저술한 ≪포박자(抱朴子)≫ <금단>편에는 금단도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는 후한 말기의 좌원방(左元放)으로부터 그의 종조(從祖) 갈선공(葛仙公)과 갈선공의 제자 정군(鄭君)을 통해 전해진 ≪태청단경(太淸丹經)≫ 3권, ≪구정단경(九鼎丹經)≫ 1권, ≪금액단경(金液丹經)≫ 1권 및 구결(口訣)을 전수해서 금단도에 달통할 수 있었다고 자술하였다.
북송 초기의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에도 금단의 연조 방법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금단은 외물(外物)의 도움을 받아 불로장생을 기하는 것으로 곧 외단(外丹)인데, 독성이 심한 광물의 합금으로 연조된 것이므로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금단도는 후세의 도사들에게 전하여져 금단이 연조되기도 하였으나 그 금단으로 황제들까지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3) 도교 교학(敎學)의 개발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을 거쳐 남북조시대로 내려오는 동안 천사도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상층사회와 민간에 두루 전파되어 신봉되었다. 천사도에서는 진나라 때 ≪상청경(上淸經)≫을 받드는 상청파(上淸派)가 생겨 전승되어 내려와 남조송(南朝宋)의 도사인 육수정(陸修靜)에 이르러 대량의 도경(道經)을 수집 정리하였고 배례(拜禮)·송경(誦經)·사신(思神)의 세 가지 방법으로 수도하여 마음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강조하여 도교의 신학적인 수준이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상청파의 도법은 양대(梁代)로 내려와 도교학자이며 연단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던 도홍경(陶弘景)에게 전수되었다. 도교의 신학은 도홍경에 이르러 집대성되었고, 그는 강소(江蘇)의 모산(茅山)에 은거하여 육수정의 도경정리사업을 크게 진전시키고 도교의 교학 체계와 금단도까지 정비해서 모산종(茅山宗 또는 모산파茅山派)의 창시자가 되었다.

4) 신천사도(新天師道)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北魏)의 도사인 구겸지(寇謙之)가 신천사도를 내세워 도교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나섰다. 그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운중음송신과지계(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았고, 천사도 개혁의 사명이 부여되었으며, 거기다 천사의 지위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신천사도에서는 신선 설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삼고 복이(服餌)·복기(服氣)·도인·벽곡 등 양생법을 채택하였다. 불교의 체제·의식·조직 등을 모방하고, 유교의 예도(禮度)를 강조했으며 청허(淸虛) 등을 높여 도가사상을 끌어 들였고 노자를 도교의 시조 자리에 확고하게 앉혀 놓았다. 조미(租米), 전세(錢稅)와 방중술 같은 오두미도의 폐단을 배제하여 청정한 도교를 확립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신천사도는 부록파와 단정파의 교법을 조정 융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겸지는 최호(崔浩)의 힘을 얻어 북위 태무제(太武帝)의 귀의를 받고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천사도의 단계에 와서 처음으로 조건을 갖춘 도교가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수당(隋唐) 시대의 도교

중국 허난성의 형산 현도관. 수 왕조 때는 도교의 교학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서 현도관을 설치, 운영하였다.

수(隋)의 왕조도 도교 교학을 연구하는 현도관(玄都觀)을 설치하고 ≪현도관일체경(玄都觀一切經)≫을 완성시키는 등 도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는 수를 거쳐 당(唐)에 내려와 북조의 신천사도와 남조의 교학 체계의 종합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도사 왕원지(王遠知)와 반사정(潘師正)이 국가의 도교정책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갔다.
당대에는 도교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 밑바탕에는 도교교단을 국가의 행정지배하에 예속시키기 위한 엄격한 정책이 깔려 있었다. 도교교단이 국가에 예속되어 1만 5천이 넘는 도사가 양성되었으며 2천이 넘는 전국의 도관(道觀)에 배속되어 주로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재초(齋醮)를 거행하게 하였고 기타 도교의 행사와 습속을 관장케 했다. 또한 당실(唐室)의 조상으로 받드는 노자(老子)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의 존호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을 민가에 두루 비치시키고 과거의 과목으로 넣었다.
당대에는 도교를 연구하는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하여 도력(道曆)을 제정하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교는 이렇게 해서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사명은 퇴색해 버리고, 국가가 관장하는 관방 도교(官方道敎)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당대라고 해서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도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안사란(安史亂)을 경계로 해서 도교교단에 대한 당 왕조의 규제가 약화되면서 도교는 다시 서민화의 현상을 다소간 드러낸다.

 

당대의 종리권과 여동빈은 '팔선'의 일원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여동빈은 상제와 미륵이 하나임을 주창한 인물이다.

당나라 말기에, 국가 통제하의 도사가 아니고 도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종리권(鍾離權)과 여암(呂嵒) 두 사람이 있다. 종리권의 자는 운방(雲房)으로 그에 관해서는 한대(漢代) 이래로 생존했던 인물로 보는 전설까지 있는데, 그는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道法)을 얻고 마지막에는 공동산(崆峒山)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어 진선(眞仙)이 되었다고 한다. 종리권은 여암을 계도하여 그를 도인(道人)으로 도화(度化)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리권은 신라의 유당학인(留唐學人) 승자혜(僧慈惠)·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 세 사람을 종남산 광법사(終南山廣法寺)에서 만나 많은 도서(道書)와 비결을 주고 내단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는 종리권이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여암의 자는 동빈(洞賓)으로 종리권에 의해 도화되기는 하였으나 다시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초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특히 민간에서 많이 받들어졌다. 그는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이들은 수련적인 도교를 개발하여 전진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 유파의 북오조(北五祖)로 추앙받으면서 조사(祖師)로 받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오대(五代)의 도교는 서민화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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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원(宋元)의 도교

북송의 진종과 휘종은 도교의 마니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송대에도 진종(眞宗)과 휘종(徽宗) 등 도교를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관방 도교의 색채를 다분히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당대(唐代)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실에서 노자를 숭상한 것과는 달리 송실에서는 조신(祖神) 내지 수호신인 조현랑(趙玄朗)에게 호천옥황대제(昊天玉皇大帝)로 존호를 올려, 최고신의 호칭으로 천존(天尊) 대신 옥황(玉皇)이 정착하게 된다.
진종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만수궁관(萬壽宮觀)을 설치시켜 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케 하고 각지의 도관에는 국가에서 제거(提擧)를 파견하여 보호와 관리를 담당케 했다. 또한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과 ≪만수도장(萬壽道藏)≫같은 대규모의 도교 일체경(一切經)의 편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전해지지 않으나, 대체의 내용은 장군방의 ≪운급칠첨(雲笈七簽)≫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송오자라 불리는 성리학의 대부들은 태극도설에 대한 정리로 정명도를 비롯한 원-명-청대의 도교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북송은 금(金)에 멸망하고 남송으로 들어가 국가는 극도로 쇠미해졌는데 이 시기에 정명도(淨明道), 태일교(太一敎), 진대도교(眞大道敎), 전진교(全眞敎), 무당도(武堂道) 등 새로운 도교 교파가 무성하게 생겨난다. 이들 새로운 교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삼교혼합(三敎混合)의 방향이다. 원대(元代)에는 세조(世祖)가 천사도를 정일교(正一敎)로 개칭하면서 보호해 주었고, 전진교도 번성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원의 태종 10년(1238)에 태종(太宗) 어전에서 불교와의 교리 논쟁이 있은 뒤부터는 도교는 대체로 퇴색의 길을 걸었다.

7) 명청(明淸)의 도교

명태조(明太祖)는 즉위 후 곧 도교교단을 통제하는 현교원(玄敎院)을 설치하여 도교를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다시 도록사(道錄司)로 개편하여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각 지방에 도기사(道紀司)를 두어 도교교단의 행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도사의 최고 칭호인 천사(天師)라는 호를 천자의 권위를 침범한다 하여 사용을 폐지하고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헌종(憲宗) 때에는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도사와 불승의 도첩(度牒)을 팔기 시작하여 도사와 불승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좌) 베이징에 위치한 백운관 (우) 타이완 먀오리 위치한 영동궁. 각각 전진교와 정일교의 대표 사찰이다. 명대에는 도교를 전진교와 정일교의 두 종파로 통합하였는데, 전진교는 명조에서 쇠퇴하고 정일교가 자리하였으나, 청대에는 정일교마저 쇠퇴하고 도교는 민간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조에서 정명도와 정일교의 지도자들을 도교교단의 최고 행정관직인 우정일(右正一)이나 좌정일(左正一)에 임명하는 등 도교교단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명실에서는 화북(華北) 지방의 도교를 전진교가, 강남 지방을 정일교가 각각 나눠 맡게 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세웠으나 실제로 전진교의 세력은 극히 약화되고 정일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정통(正統) 10년(1445)에 ≪정통도장(正統道藏)≫ 5,305권과 만력(萬曆) 35년(1601)에 ≪속장 (續藏)≫ 180권을 편찬 간행하여 유일한 도교 일체경(一切經)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청대에 내려와서는 정일교에 대한 청실의 태도도 냉각되고 전진교도 금단도에 기울어지는 등 도교 교학의 지도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청대의 도교는 대체로 삼교 혼합의 방향이 현저해지고 서민화의 경향이 실질적으로 뚜렷해진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8) 근현대의 도교

근현대에 들어 공산당(共産黨)과 국민당(國民黨)의 내전으로 도교의 역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공산당은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문화대혁명을 통한 종교 탄압을 자행했다. 이 와중에 도사들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강제 환속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많은 도관과 절이 문을 닫았다. 가까스로 연명한 사람들은 대만, 동남아 등지의 화교 거주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때문에 지금도 대만이나 화교 거주 지역들에서는 이때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도교를 계승하며 민간 신앙을 발전시켜왔다.
이후 공산당이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 발전 및 지원 정책을 펴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사라진 도관들을 재건되었고 도피했던 도사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이 종교의 통제와 관리를 하는 나라이기에 중국의 도교는 학술적인 부분이나 양생(養生)과 관련된 기(氣) 수련, 무술만이 발전하였다.
대만 및 동남아로 도망친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자체적인 교단, 교리, 경전을 갖추고는 있으나 원시 도교 시절의 무축적(巫祝的), 기복신앙적(祈福信仰的) 성격이 다시 대두되면서 주술적인 민간 신앙 정도로 취급당하였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상좌부(上座部) 불교가 발달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구보 노리따다,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출판사, 20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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